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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해결책

다카키는 각기병의 원인을 알아 병을 크게 줄였으나 일부 선원들은 이를 따르지 않았는데 이유는 일본 사회에서 인정된 “좋은” 식사를 끝까지 고집했기 때문이었다.

일본 해군은 선원들에게 단백질 공급을 늘리려고 빵과 비스켓을 주었다. 선원들은 건강을 위해서 빵의 부드러운 부분만 먹었고 딱딱한 것은 바다로 버려 다카키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만들었다.

1885.3월 그는 단백질이 풍부한 보리와 쌀을 섞은 해결책을 만들었다. 많은 일본 해군 사병들은 일본 사회의 하층민에서 왔다. 이들은 기장과 도정하지 않은 쌀로 지은 밥을 먹고 자랐다. 그들은 너무 가난해 물고기와 야채를 먹지 못해 가장 큰 소망은 해군이나 육군에 들어가 흰 쌀밥을 먹는 것이었다.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식사로 돌아가길 거부했다.

“작년 대부분의 사병들은 빵만큼 고기를 싫어하는 것을 알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문제를 그들이 하고 싶은대로 두면 전과 같이 각기병 환자가 많이 생길 것이다.” 라고 다카키는 썼다.

다카키는 또 군대 의사와 학자들로부터 심한 비판에 직면했다. 프러시아군과 독일 스타일의 의료술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 제국군은 다카키의 치료 사례 이후에도 각기병은 전염병이라고 믿었다.

수천년간 중국의 전통 한방 의약에 의해 병이 치료되어 왔다. 한방에서 질병은 열이나 악마가 일으킨다고 보고 한방 약초로 치료되었다.

때때로 한방은 엉터리였으나 팥과 보리가 각기병에 효과가 있는 것처럼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많은 일본인들은 한방을 구식이라고 보았고 한방을 쓰는 것은 수치스럽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한방처럼 일본인들은 다카키의 처방을 뿌리가 있는 식물이라고 구식의 넌센스로 생각했다.

다카키의 통계는 때때로 무시되었다. 실험실의 통계와 객관성이 더 믿음직했다. 그들은 다카키의 성공은 함선의 위생 덕분이라고 주장했다.

다카키의 이론을 멀리 했지만 일본 육군은 각기병 문제를 심각하게 알고 있었다. “육군의 각기병 심각성은 갈수록 요동쳤으며 가장 넓게 퍼져 사망자가 가장 많았다.” 라고 육군의 수술의 타다노리 이시구로는 말했다.

“각기병이 육군에 너무 넓게 퍼져 군의는 이를 조사해 예방 치료하는 것이 시급했다.” 라고 이시구로는 덧 붙였다.

그러나 육군은 각기병 문제를 해군과 매우 다르게 취급했다. 육군은 각기병을 미생물적인 원인으로 보아 위생에 초점을 맞췄다.

해답은 너무 평범해 육군의 각기병 문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1875년부터 민간 감옥에 보리와 쌀이 섞인 식사를 주었다.

오사카에 있는 육군 담당의 도시쿠니 호류치는 처음에 다카키의 성공을 의심했으나 보리가 더해진 죄수들 식사에서 오는 특이한 변화에 관심을 가졌다.

1885년 가을 사령관에게 청원하여 호류치는 육군의 밥에 보리를 섞었다.

보리쌀은 평화시 육군의 비공식 식사였가 되었다; 육군의 각기병 문제은 1885년 26%에서 1887년 4%로 떨어졌다. 이것은 1895-1895년 중일전쟁까지 2% 아래로 떨어졌다.

전쟁시에는 공식의 쌀밥이 보리밥보다 많았다. 이 기간에 해군은 각기병 환자가 하나도 없었으나 육군은 이 병으로 4,000명이 죽었고 41,000명이 입원했다.

해군 의료진이 공격하자 육군 의료진은 익명으로 “육군은 각기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통적인 의약이나 통계적 추측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것은 실험 의약에 기초한 과학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라고 받아쳤다.

다카키가 해군에서 각기병을 없앤지 20년 후 일본은 1904년 러일 전쟁을 시작했다. 육군은 각기병으로 25만명을 입원시켰고 그중 27,000명이 죽었다. 이 놀라운 사망자 수는 육군의 저항을 끝냈다. 1905.2월 전쟁 중반에 마사타케 장군은 육군 사병에게 보리가 섞인 밥을 먹이도록 명령했다.

전쟁 후 긴급 각기병 조사 위원회는 이 병에 의한 일본 사회층의 분열을 조사했다. 위원회의 조사와 다카키의 완전한 성공이 두려워 일본 왕이 개입했다. “육군의 각기병 문제는 육군이 보리쌀밥을 제공했더라면 막을 수 있었다.” 라고 왕은 발표했다.

1885.12월 다카키는 해군의 위생국 장관이 되었고 1888년 일본의 첫 의학 박사가 되었다. 1905년 남작의 지위를 받은 그는 “보리 남작” 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1905년 영국의 랜셋 의학 저녈은 다카키는 육군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들과 싸움을 했다고 실었다. “이 모든 고난의 해에 나는 식사를 총의 화약과 비교하여 나의 견해를 설명했다.” 라고 보리 남작은 설명했다.

“나는 식사는 총의 화약처럼 사람 몸의 첫 번째 힘이며 따라서 선원들에게 맞는 음식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Eating Too Much Rice Was Almost A Worst Mistake For Japan Than Pearl Harbor
Some very strange history you might have missed.
by James Simpson February 2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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