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여기저기서 봄소식이 들려온다.
푸른 열대에서만 40년 가까이 살아온 내게 봄과 가을은 늘 설레는 계절이다.
대지를 뚫고 올라오는 새싹들, 연둣빛으로 빛나는 들판, 수도 없이 피고 지는 꽃들,
온 가슴을 다 열고 받아들여도 모자란 생명력...

몇년 전 봄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섬진강 벚꽃 보다 내 마음에 더 강하게 봄으로 남은 곳이 있다.

쌍계사 아래 위치하고 있던 “관향다원“
간판도 없던 이곳을 지인의 소개로 찾아갔는데 들어가는 입구부터 그 단아함에 반해버렸다.
안채로 들어가니 후덕하신 모습의 안주인께서 반갑게 맞아주셨는데 발 딛는 곳마다 온 집을 보물 덩어리로 채우고 계셨다. 그림과 다기들 벽과 창호에 그려진 글과 그림들....

여기를 보아도 저기를 보아도 그려진 묵화와 글씨들로 가득한 창가에 앉으면, 파릇파릇 새싹이 올라오는 나무들이 배경 그림이 되어주었고 외할머니 생각이 저절로 나는 고운 모시발을 걷어 올려 동그란 문손잡이를 잡아 젖혀 분합문을 열어도 그대로 그림이었다.

찻상이 차려져 있는 방에 들어가니 온통 눈이 온 듯 흰 작은 한지들이 방바닥에 널려있어서 처음엔 잘못 버린 것들인 줄 알았는데 창호지를 잘라 방바닥을 때운 것이라고, 이 무슨 발상인가? 온돌방을 한지를 조각내어 잘라 땜질을 하다니!

그녀가 내온 찻상에는 온갖 차들이 다 있었다.
찻상 한 귀퉁이에 붉은 동백과 매화는 정취를 더해주었다.
조근조근 설명을 들어가며 차에 취해있을 무렵 찻잎 부침개가 간식으로 나왔다.
차를 끓이고 남은 것으로 만들었다는데 와~~! 맛있다!

피곤할 텐데 쉬어 가라며 황토 찜질방에 불을 넣어주셨는데 찜질방마저 그녀의 예술혼이 가득했다.
벽에 있는 그림과 글들은 다녀가신 손님들께서 차를 드시거나 묵으시면서 남겨 놓으신 것이라니 예술인의 사랑방인가보다. 내 참 어찌 이런 곳에 왔을까나...

일정 때문에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뒤로 하고 왔는데 두 번 다시 못가고 말았다.
한 번은 간판 없는 그곳을 찾아 헤매다 못 찾았고 매번 전화만 하고 못 갔었다.

한데 이호영선생 그녀가 작년에 돌아가셨단다.
그녀가 없는 관향다원에 새로운 글과 그림이 그려지고 있을까?
한 나절 인연이었던 내가 이리 그녀를 그리니 그녀와 함께 예술을 논하던 이들은 얼마나 그녀가 그리울까? 내가 떠나도 생면부지 객같은 이가 날 그리워 할 수 있을까?

이 봄 다시 관향다원에 가볼까 한다.
떠나간 그녀를 그리워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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