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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당입구 수령이 350여년된 느티나무. 2> 문천공 신도비-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제187호
3> 홍살문. 4> 문청문. 5> 충의문. 6> 송강사. 7> 송강사 내부 정철 영정.
8> 송강사에서 내려다 본 전경. 9> 송강기념관. 10> 온시숨터. 11> 앞 묘소는 둘째 아들 종명의 묘소
12> 송강 묘소. 13> 관동별곡 가사비. 14> 훈민가비


송강 정철의 유적 - 송강사(松江祠)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년 ~ 1593년 [ 자 계함(季涵), 호 송강(松江), 시호 문청(文淸) ]

松江은 조선 중종 31년(1536년) 윤 12월 6일 서울 장의동 ( 현 종로구 청운동)에서 7남매중 막내로 태여났다
1551년(명종 6) 원자(元子) 탄생의 은사(恩赦)로 아버지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자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전라도 담양 창평 당지산(唐旨山) 아래로 이주하게 된다. 이곳에서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여년을 보냈다.
1561년(명종 16) 26세에 진사시 1등을 하고, 이듬해 문과 별시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성균관전적 겸 지제교를 거쳐 사헌부지평에 임명됐다.
함경도암행어사를 지낸 뒤, 32세 때 이이(李珥)와 함께 호당(湖堂 : 젊은 문관 가운데 뽑아 휴가를 주어 학업만을 닦게 하던 서재)에 선출됐다.
1580년(선조 13) 45세 때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관동별곡」과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했다
1583년(선조 16) 48세 때 예조판서로 승진하고 이듬해 대사헌이 됐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해(1585)에 사직, 창평으로 돌아가 4년간 은거생활을 했다. 이때 「사미인곡」·「속미인곡」 등의 가사와 시조·한시 등 많은 작품을 지었다.
54세 때인 1589년(선조 22)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로서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고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의 작품은 훈훈한 인정을 느끼게 하는 인간미 넘치는 강호 산수의 자연미를 노래한 작품이 이다. 그리고 선취(仙趣)적 기풍과 멋스런 호방함을 담아낸 작품 등 폭넓은 사대부의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선조 26년(1593년) 강화도 송정촌에서 생계조차 꾸리기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12월 8일에 세상을 타계하였다. 이듬해 1954년 2월 先祖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고양군 신원에 장사하였고 1665년(현종6년)에 진천현감으로 있던 손자 양(瀁)은 서인의 영수 송시열과 상의하여 충북 진천 현위치로 이장하였다.
묘소가 둘 있는데, 위는 송강의 묘소이고 아래는 둘째아들 종명(宗溟)의 묘소이며 단지(斷指)까지한 효자라 유훈에 따라 이곳에 모셨다.
1684년 (숙종10년)에 文淸이라는 시호가 내림.

작품으로는 「성산별곡」·「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등 4편의 가사와 시조 107수가 전한다. 시조는 『송강별집추록유사(松江別集追錄遺詞)』 권2에 「주문답(酒問答)」 3수, 「훈민가」 16수, 「단가잡편(短歌雜篇)」 32수, 「성은가(聖恩歌)」 2수, 「속전지연가(俗傳紙鳶歌)」 1수, 「서하당벽오가(棲霞堂碧梧歌)」 1수, 「장진주사(將進酒辭)」 등이 실려 있다.

(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산 14-1 소재 )

< 안내서에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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